트롤리 문제·죄수의 딜레마·무지의 베일 — 유명한 사고실험 풀이

다섯 명을 살리려 손잡이는 당기면서, 육교 위에서 한 사람을 미는 건 왜 망설여질까요? 숫자로만 움직이지 않는 우리 도덕과 다시 만날 사이에서 협력이 이기는 이유를 사고실험으로 따라가요.

답을 주는 글이 아니에요. 당연하다고 여기던 걸 한 번 흔들어 보는 자리예요.

노자의 무위

노자의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기가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기입니다. 물은 다투지 않고도 바위를 이깁니다. 흐름을 거스르는 힘이 아니라 결을 따라가는 힘. 가장 좋은 개입은 개입한 티가 나지 않는 개입이라는 통찰입니다.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거예요. 그릇이 쓸모 있는 건 비어 있어서고, 방이 쓸모 있는 건 뚫려 있어서죠.

그릇은 비어 있어서 쓸모가 있다.

귀납의 문제

해가 매일 떴다고 해서 내일도 뜬다는 보장은 논리적으로 없습니다. 흄은 우리의 모든 경험 법칙이 사실은 습관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수천 번 확인된 규칙도 단 한 번의 반례에 무너집니다. 과학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흄의 지적은 아직도 안 풀렸어요. 다만 과학은 답을 못 찾은 대신 태도를 바꿨어요 — 증명 대신 반증을, 확신 대신 잠정을 택했죠.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언어의 한계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썼습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은 다루기 어렵고,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은 흐릿하게 남습니다. 어휘가 늘어나는 만큼 세계가 넓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했고, 후기에는 스스로를 뒤집었어요. 말의 뜻은 정의가 아니라 쓰임에 있다고요.

말의 뜻은 사전이 아니라 쓰임에 있다.

아모르 파티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운명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우고 싶은 과거까지 포함해서, 이 삶이 통째로 반복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그 질문을 삶을 검사하는 시금석으로 썼습니다.

니체는 같은 삶이 영원히 반복돼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느냐 물어요. 이건 위로가 아니라 시험이에요. 견디는 게 아니라 사랑하라는 거죠.

견디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트롤리 문제

전차가 다섯 명을 향해 달려요. 손잡이를 당기면 다른 선로로 빠지는데 거기엔 한 명이 있어요. 당기시겠어요?

대부분 당긴다고 답해요. 그런데 육교 위에서 덩치 큰 사람을 밀어 전차를 세우는 판이면 대부분 못 한다고 해요. 결과는 똑같이 다섯 대 하나인데요. 우리 도덕은 계산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숫자가 같아도 손으로 미는 건 다르다.

무지의 베일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데, 내가 그 사회에서 누가 될지 모른다고 해봐요. 부자일지 가난할지, 건강할지 아플지.

롤스는 그 상태에서 고른 규칙이 정의롭다고 봤어요. 내가 최약자가 될 수도 있으니 최약자의 처지를 그냥 못 지나치거든요. 공정함은 착함이 아니라 무지에서 나온다는 발상이에요.

내가 누가 될지 모를 때 고른 규칙이 공정하다.

죄수의 딜레마

둘 다 침묵하면 가볍게 끝나요. 그런데 각자에게는 배신이 늘 유리해요. 그래서 둘 다 배신하고, 둘 다 더 나빠져요.

각자 합리적으로 행동했는데 함께 손해를 봐요. 신뢰가 도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죠. 다만 게임이 반복되면 달라져요 — 다시 만날 사이에서는 협력이 이깁니다.

다시 만날 사이에서는 배신이 손해가 된다.

데카르트의 악마

감각은 속을 수 있고 꿈도 진짜 같아요. 어떤 악마가 내 모든 경험을 조작하고 있다면요?

데카르트는 다 의심하다가 하나에 걸려요 — 속고 있으려면 속을 '내'가 있어야 하죠. 의심 자체가 의심할 수 없는 바닥이 돼요. 매트릭스도 통 속의 뇌도 이 물음의 후손이에요.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브루니가 적어요

색을 바꾸며 숨는 카멜레온이에요. 개발 글 사이사이에 철학·음악·그림·성경 구절 이야기도 한 편씩 적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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